1/22015.08.26 10:30

'나르시즘이' 없다.

요즘 세상을 보면 나르시즘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절대 않다.


물론 나르시즘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말을하면 자기애에 극단적인 예로 리비도의 대상을 자신으로 삼는 것을 말하기에 없어도 되고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없어야되는 것이 맞는 것이겠지만 이 글에서는 나르시즘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까 한다.

아니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사용되어지는 나르시즘의 의미로 [자기애].... 

비슷한 말로는 자존감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겠다.   

나르시즘의 부재인지 아니면 너무 나르시즘이 넘친 나머지 자신의 몸과 영혼.... 나아가 주위 사람들까지 다치게만드는 삶을 살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간의 내면에서 나르시즘이 고갈되어 가고 있고 나르시즘이 변형되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인듯 하다.


니콜라 푸생니콜라푸생 <에코와 나르키소스>


나르시즘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미소년 '나르키소스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강의 신 케피소스와 님프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이 아름다운 소년은 남녀가 모두 좋아하는 미모(?)를 가졌는데, 이정도 미모를 가진사람들이 늘 그러하듯이(살짝 이해할 수도...) 그런 주위 관심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 슬픈 운명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를 사랑한 여러 사람들과 신, 요정들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코(헤라의 벌을 받아 자신이 들은 마지막 말만 반복하는 슬픈 님프)도 나르키소스를 연모했다. 하지만 나르키소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이에 에코는 상사병에 걸려 여위어가다가 결국 목소리만 남게 된 것이다. 이에 에코는 자신의 사랑을 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한 나르키소스에 복수를 해달라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간청했고 네메시스는 에코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어느날 나르키소스는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샘가에 멈추었고 물을 먹기 위에 물가로 몸을 가져가다가 그만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물에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 모습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그 곳을 한발짝도 떠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그 곳에서 죽고 만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사랑에 빠져 그만 죽음을 맞이한 나르키소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나는 나르키소스의 비극적인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매력에 빠진 나르키소스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고 내면적으로나 외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안다면 주위에 더 나은 미모라든지 더 나은 삶의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고 신경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그 연못가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굶어죽은 것처럼...


나르키소스워터 하우스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카라바조 <나르키소스>




주위 사람들에 신경쓰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신경을 쓴다면 좋지 않을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끼지 못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르키소스의 비극적인 결말보다 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이다. 나르키소스처럼 자기애에 빠져서 굶어 죽으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이란 측면에서 행복의 초점과 기준을 능동적으로 가꾸어가자는 것이다. 


점점 더 나르시즘이 없어지고 혹은 이상하게 변형되어가는 세상. 니콜라 푸생의 [에코와 나르키소스]를 보면서 조금만 더 나르키소스와 같은 나르시즘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조금 더 자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믿어 왔던 것처럼 이데아가 실현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나우즈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